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토 히로부미 (문단 편집) = 출생과 정치활동 = [[http://www.yoshida-shoin.com/monka/Hirobumi_Ito_2.jpg]] 어릴 적 이름은 리스케(利助)였으나, 천하다 하여 도시스케(利助), 슌스케(春輔)를 거쳐 히로부미(博文)로 이름을 고치었다. 원래 그의 아버지 하야시 주조(林十臓)는 소작농을 짓는 농민 출신이었지만, 미즈이 다케베라는 하급 무사에게 근면함을 인정받아 그의 양자가 되면서 하급 무사계급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하급 무사는 상급 무사의 신변을 돌보고 잡일을 담당하는, 한마디로 사실상 서민에 불과한 낮은 신분이었다. 이토 자신도 유신3걸의 일원인 [[기도 다카요시]]의 시중을 들면서 출세한 경우다. 젊어서는 몸이 빼빼 말라 호리병이라고 불렸다 한다. 16살 때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을 찾아가 배웠다. 15살 때부터 [[초슈]]번의 지금의 말단 공무원(9급 공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윗 과장급 상관이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을 추천하면서 거기 가보라고 해서 찾아갔다. 쇼인의 제자들은 후에 [[조슈 번]] 유신 지사로 메이지 유신을 위해 크게 활동하고 근대 일본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기도 다카요시나 이노우에 가오루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슈계 인사들은 대부분 쇼인의 제자. 가장 대표적인 예만 들어봐도 쇼인 문하의 천재로 불렸던 [[타카스기 신사쿠]], 부정선거의 달인 [[시나가와 야지로]],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의 사실상 중시조격인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출세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 선배들의 행동대장 똘마니 노릇을 하던 히로부미. 선배 자알 만난 덕분에 영국 유학도 경험하고 능력있는 선배들이 [[메이지 유신]]이라는 밥상 차릴 때, 부엌에서 밥이나 짓던 쫄따구 히로부미. 선배들이 밀어주고 당겨줘서 고위직을 맡고, 선배들이 차례차례 죽으면서 어느새 자신이 일본 초대 총리로 최고 우두머리가 된다. 물론 개인적인 능력도 있었고 국제 정세를 읽는 감각이 있었지만, 한 마디로 선배 잘 만나서 대성공한 케이스. 이토는 쇼인에게는 인정받은 일이 없고 (쇼인이 이토에게 내린 평가는 한마디로 "재능없슴"), 오히려 [[타카스기 신사쿠]]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19살 때 부터는 [[존황양이]] 운동에 참가해서 영국 대사관 방화 사건에서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한 적도 있고, 본인은 부정했지만, 천황의 퇴임을 주장한 국학자를 암살한 적도 있었다.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이 [[이이 나오스케]]의 안세이의 대옥사로 죽은 후, 도쿠가와 에도 막부 타도 운동에 불타오른다. 22살 때는 상급 무사 이노우에(당시 28살) 등 '죠슈 파이브'라고 불리우는 친분이 있었던 4명와 함께 번의 공금을 횡령해서 그 돈으로 영국으로 밀항, 영국에서 해군 기술을 배우려고 유학하려고 했지만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죠슈 번과 영국사이에 전쟁(시모노세키 전쟁)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전쟁을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사상적으론는 영국으로 가는 길에 들린 [[상하이]]에서 [[아편전쟁]] 이후의 중국의 실태를 실감하고, [[존황양이]]에서 양이를 버리고 개화파로 돌아선다. 귀국한 뒤에는 조슈번에서 일하며 조슈번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과 벌인 전쟁의 뒷처리를 맡아 영국과의 평화협상에 통역으로 참여했고, 막부(幕府)와 조슈번(長州藩) 사이에 벌어진 막장(幕長戰爭. '제 2차 조슈 정벌')이 터진 뒤 막부와의 타협을 생각하던 보수파를 몰아내는 데 참여, 이후 조슈번을 주도하게 된 소장파의 일원이 된다. 도사, 히젠 등과 사쓰마 사이에 벌어진 정한 논쟁 등의 여러 정쟁에서 조슈와 사쓰마 파벌을 중재하면서 사쓰마 파벌의 [[오쿠보 도시미치]]의 신임을 얻어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되었으며, 오쿠보, 기도 등의 거물들이 잇따라 숨지면서 생긴 정권의 공백을 메우면서 수완을 발휘하고 1881년 오쿠마 시게노부와의 정쟁 직후 메이지 정권의 명실상부한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1885년에는 내각제 시행과 함께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고, 뒤이어 추밀원 의장, 의회 창설과 함께 귀족원 의장에 취임하는 등 정상가도를 달렸다. 평민이나 다름 없던 일개 하급무사가 멀쩡한 무사들도 평민이 되던 시절에 되려 공작이 되는 벼락 출세를 한 것이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 극초반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노선은 비주류노선에 가까웠다는 견해가 있다. 아무래도 사쓰마 파벌의 영향력이 워낙 강한 초기에는, 정치인-관료 진영의 (비교적) 온건파 조슈 파벌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노선은 상대적으로 비주류였던 듯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